먹먹함.
책을 읽고난 내 감정은 이 단어로 요약이 되겠다. 사람에 따라 건드려지는 감정선의 차이가 있겠지만 내게는 그 건드려지는 깊이가 아주 깊고 넓은... 후유증이 많이 남는 소설이다.
처음 읽어나갈 때는 엄마의 말뚝을 반복해 읽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실제로 초반부는 엄마의 말뚝과 거의 쌍둥이에 가까울 정도로 흡사하다. 하지만 엄마의 말뚝에서는 세련되게 치장하고 문학적으로 정제됐던 부분들이 이 싱아~에서는 날 것에 가깝게 드러난다.
그녀의 기억 속에 남아 묘사되는 1930년대부터 한국 전쟁 당시의 서울과 개성의 모습. 그녀가 겪었던 그 유년과 소녀 시절의 기억들. 분명 나와 접점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가족사와 감정선들이 참을 수 없이 나를 건드리고 헤집어 놓고 있다.
거리를 놓고 내가 분해하고 영상화해야할 부분을 끌어내는 재료로 봐야 하는데... 그게 되지 않는다. 주인공 '나'의 오빠가 집에서 잡은 돼지를 끝끝내 먹지 못했던 것과 비슷한 심리라고 해야하나. '나'의 엄마와 오빠라는 존재에 대한 그다지 옳지 않은 중첩과 이입이 굉장히 나를 힘들게 한다.
왜일까? 시대도 사건도 나와 그야말로 한푼의 연관성도 갖고 있지 않은데? 모르겠다. 때때로 빠져드는 우울이 이 소설을 핑계삼아 고개를 드는 걸 수도 있겠지. 아니면 나도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나를 건드리는 어떤 코드랄까 단어가 있었을 수도... 아니 그게 뭔지 알고 있다. 다만 여기에 쓰지는 않겠다.
어쨌든 감정은 감정이고...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직업 의식으로 건져낸 기억들을 조합해 보자면... 이 싱아~를 번역하는 건 번역자에게 정말로 재앙에 가까운 작업이었을 것 같다.
박완서 선생 자신이 토로했듯 사라져가는 아름다운 우리 단어와 표현을 조금이라도 더 남겨놓고 싶었다는 그 의도에 걸맞게 내가 전혀 몰랐거나, 혹은 기억 저 아래 깊숙이 파묻혀서 거의 완전히 잊고 있었던 단어들이 여기선 정말 풍부하게 살아서 생동하고 있다. 한 백년 쯤 지나면 문학이 아니라 언어학에서 1990년대에 쓰여진 한국어 어휘의 보고로 연구과제가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순수하게 기억에 의지해서 쓰려고 했다는 게 정말 거짓처럼 느껴질 정도로 표현 하나하나가 날 것인 양 보이면서도 아주 정교하고 또 신선하다. 쓰고 싶은 걸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작가의 공력이랄까.
희미하긴 하지만 어떻게 그려내야할지... 그림이 머릿속에서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 다큐멘터리를 완성해 나가면서 소설에서 받은 이 감정적인 소모를 극복해나가야 할텐데... 내가 순수문학 소설을 기피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것 때문이다. 너무 꼬리가 길어서 회복력이 현저히 약한 나 같은 사람에게는 버겁다.
책/픽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박완서 | 웅진지식하우스(웅진닷컴) | 2007.9.?-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