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홈피를 운영할 때 올려놨던 자료를 퍼왔다.
빠심에 비해 내용이 간략한 건 사모가 넘쳐 -> 책 지름
Nijinsky, Vaslaw (1890-1950) 바슬라브 니진스키
1914년까지 디아길레프의 발레 륏스 수석 무용수였던 니진스키는 무용의 신이라고 불리며 전설적인 춤과 함께 비극적이고 드라마틱한 생애로도 유명하다.
바슬라브 니진스키는 1890년 키에프에서 토마스 라우렌티예비치 니진스키와 엘레오노라 베레다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모두 유명한 무용수였는데 특히 아버지는 대가적 기교와 엄청난 도약으로 유명했다. 니진스키 가족은 그들의 무용단을 가지고 러시아 제국에서 공연했다. 니진스키는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카프카즈에서 보내면서 그의 형 스타니슬라브와 동생 브로니슬라바와 같이 아역을 춤췄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춤에 대한 위대한 예술가적 자질을 발견하고 그에게 춤 렛슨을 시작한다.
9살 때 니진스키는 세인트 페텔스부르크의 황실 발레학교에 들어가자마자 그의 선생들에게 이 시대 최고의 무용수가 될 특별한 자질을 인정받는다. 그가 16살이 됐을 때 그는 학교의 통상적인 수업을 계속할 이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선생님들의 권유로 졸업하고 마린스키 극장에 들어간다. 이때 그는 이미 ‘세계의 8번쨰 불가사의’ ‘북의 베스트리스’ - 덴마크의 유명한 무용수이자 안무가 오귀스트 부르농빌 역시 그가 살아있을 때 북의 베스트리스라는 별명으로 불렸었다- 로 불리고 있었다. 그의 학창 시절부터 그는 군무의 일원으로 시작해 작은 배역을 맡으며 마린스키 극장에 출연한다.
같은 학교의 선배이자 일찌감치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후원을 자청했던 포킨느나 마린스키 시절 그와 파트너를 자주 이뤘던 전설적인 무용수 안나 파블로바는 무용원 시절 춤 뿐 아니라 학과에서도 뛰어난 성적을 자랑했다. 하지만 니진스키의 경우 춤을 제외하고는 심각할 정도로 흥미를 보이지 않아 낙제의 연속이었다고 한다. 그를 졸업시키기 위해서 교사들이 문제를 미리 유출해 시험 준비를 시켰지만 그것도 낙제. 결국은 재시험을 봤다는 전설 같은 얘기도 전해진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확실한 증거는 없다.
어쨌든 니진스키는 1907년 봄에 졸업했고
1909년 황실 극장의 전직 관리였던 세르게이 디아길레프는 블라디미르 공의 위촉을 받아 마린스키와 볼쇼이 극장 발레단원을 주축으로 발레단을 만든다. 디아길레프는 봄에 파리에서 발레 공연을 갖기로 결정하고 니진스키에게 수석 무용수로 합류할 것을 제의한다.
1912년 그는 안무가로서 활동을 시작한다. 그는 디아길레프의 발레 륏스에서 목신의 오후, 유희, 봄의 제전을 안무한다. 목신의 오후와 봄의 제전은 무용가로서 니진스키의 명성에 안무가로서의 재능을 확인시켜주는 승리의 무대였다. 온 파리와 유럽은 그의 혁신적인 안무에 흥분하거나 분노하면서도 아무도 그의 탁월함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고 발레는 모두 유래없는 성공을 거둔다.
첫눈에 니진스키에게 매혹된 디아길레프는 역시 니진스키에게 반한 황족에게 '그의 예술을 위해서 물러나라,'는 대담한 발언을 하고 연적을 제거한다. 그리고 니진스키를 손에 넣고 충실한 후원자이자 예술적 동반자의 역할을 해주었다.
니진스키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그는 타고난 동성애자는 아니었던 것 같다. 니진스키와 디아길레프의 동성애에 대해 여러가지 얘기들이 많지만 그의 친구들이 들은 니진스키의 고백을 종합해보면 그는 디아길레프와의 관계를 엄청나게 혐오했던 것으로 보인다. 생계를 위해 자신을 원하는 디아길레프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 나중에 그가 정신분열증을 일으키는데 일조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안무가와 무용가로서 그의 성공은 비할데 없었지만 그가 헝가리 출신의 무용수 로욜라와 결혼하면서 디아길레프의 버림을 받게 된다. 동성애자인 디아길레프는 연인 니진스키의 배신에 분노해 그의 결혼 소식을 듣자마자 해고했고 니진스키는 발레 륏스와 디아길레프의 영향을 벗어나 독자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그의 명성과 재능에도 불구하고 디아길레프와 같은 흥행사로서의 재질은 부족했던 니진스키의 발레단은 계속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는다. 틸 오일렌슈피겔은 디아길레프와 결별한 이후 독립한 시기에 미국에서 안무했는데 그가 안무한 다른 작품들처럼 모험적일 정도로 독창적이다. 계속되는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춤추는 것으로 정신적인 균형을 유지하던 니진스키는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스위스로 피신하게 된다. 그리고 전쟁의 분위기는 벼랑 끝에 있던 그의 신경을 한계까지 몰아가고 그는 1919년 발작을 일으킨다.
1919년 29세의 나이에 니진스키는 정신 분열증으로 무대를 떠나 평생을 정신병원을 전전하며 보낸다. 평생 그의 곁을 떠나지 않은 그의 아내 로욜라는 전쟁이 끝난 뒤 예술적인 분위기가 그를 정상으로 돌리는 데 도움이 될까해서 파리로 이주하지만 그의 증세에는 차도가 없었다. 그는 1919년부터 1950년까지 스위스, 프랑스, 영국을 옮겨다니면 살다가 1950년 영국에서 죽는다. 그리고 니진스키는 파리 몽마르트 공동묘지의 프랑스의 위대한 무용수 오귀스트 베스트리스 옆자리에 묻힌다.
10년은 자라고, 10년은 배우고, 10년은 춤춘 사람. 바로 니진스키이다.
초연 작품
클레오파트라 (포킨느, 1909)
세레라쟈데 (포킨느, 1910)
카니발 (포킨느, 1910)
페트루슈카 (포킨느, 1911)
장미의 정령 (포킨느, 1911)
푸른신 (포킨느, 1912)
다프니와 클로에 (포킨느, 1912)
목신의 오후 (니진스키, 1912)
유희 (니진스키, 1913)
틸 오일렌슈피겔 (니진스키, 1917)
안무작품
목신의 오후 (1912)
유희 (1913)
봄의 제전(1913)
틸 오일렌슈피겔 (1917)